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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멋진 결혼을 하자 2008. 8. 22. 16:18

[대통령 부인들]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여성신문

2007/03/30 10:09

http://blog.naver.com/jhl830617/80036325545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대통령 부인들] 젊을적엔 활동적 여성리더
DJ 만나며 가시밭길 인생
"김대중 정권 지분의 40%는 이 여사의 몫"
독자적 해외순방 영역 개척‘선 굵은’업적
 

유복한 기독교 가족 출신의 인테리 여성
이희호여사는 1922년 9월, 부친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의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부친은 우리나라 의사면허 4호로 전북 남원 도립병원장과 경기 포천 도립병원장을 지냈다. 어머니 이순이씨는 한의사집 가정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 여사는 모태신앙인이 됐다.

이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고학력의 퍼스트레이디다. 이화여고, 이화여전을 다녔으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이화여전 졸업을 하지 못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다시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적을 옮겼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이 여사는 미국 스칼렛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재기 발랄하고 활동적인 리더 ‘히히호호’
“대학교 1학년 때 ‘Foolish’라는 연극을 했는데 내가 시나리오 쓰고, 주연하고, 연출도 다 했다. 나는 항상 웃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여사는 인기가 좋았다. 동기생보다 2~3살 많은 남학생들도 그를 ‘누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호국단 부대장으로 사범대생 800명 앞에서 호령을 하기도 했다. 총학생회에서는 사범대 대표를 맡았다. 강원룡 목사는 ‘내가 만난 이희호’(1997년)라는 책에서 “어느 대학에서 강연 후 학생들과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그의 차례가 되자 “히히호호” 하며 크게 웃는 것으로 ‘희호’라는 이름을 소개했다”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의 이 여사는 이처럼 재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여성리더였다.

고난의 길, DJ 대통령 만들기  
DJ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 여사의 인생행로 전체를 흔들어버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71년 대선 패배 이후 남편은 최고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었고, 이 여사의 인생에도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같은 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되었다. DJ의 망명·납치·구금·연금 등이 이어졌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계속됐다. 이 와중에 DJ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됐다.

77년 정월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자 이 여사는 1년 가까운 석방투쟁과 정치활동, 가장으로서의 책무에 시달리면서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짓눌렸다. 건강도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키 172㎝에 몸무게 43㎏.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도지는 관절염은 그녀의 마른 다리를 괴롭혔다. 이 여사는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손에 쥔 채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이희호의 편지, 내일을 위한 기도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면서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은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독재와 싸우는 조국의 지도자와 동지로 변해갔다. 이 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차입하는 옷은 속옷까지도 다려 넣었다.

그녀의 내조 중에서도 남편에게 격려가 되었던 것은 편지였다. 이 여사는 DJ가 옥중에 있을 동안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가정사 외에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 남편의 투쟁에 대한 격려 등이 담겨 있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남편이 요구한 책 외에 자신이 직접 고른 서적 1~2권을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여사의 편지는 남편은 물론, 이 여사 자신의 내일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이 여사가 이때 쓴 편지는 98년 <내일을 위한 기도>(여성신문사)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여사는 87년, 92년 대선에서 남편이 연거푸 패배하자 무척 상심했다. DJ가 97년 대선 4수를 결심했을 때도 두말없이 다시 운동화 끈을 잡아맸다. 이를 두고 한 지인은 “김대중 정권 지분의 40%는 이 여사의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재단’ 산파역
97년 12월 DJ는 4수 끝에 드디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여사의 나이 75살 때다.

여성·사회 운동가였던 이 여사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행정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장관들 임명장 수여식 때는 부부가 동반해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관행이 저절로 생겨났다.

이 여사가 영부인이 된 후 가장 먼저 가진 직책은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의 명예회장이었다. 사랑의 친구들의 골격은 당시 박영숙 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김성재 교수 팀에서 만들었다. 당초 김성재 교수와 박 이사장은 의견 차이가 있었다. 김성재 교수는 대학생들이 전부 참여하는 단체 구성을 꿈꿨고, 박 이사장은 결식아동을 돕는 일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여사는 박 이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일의 이름과 틀은 김성재 교수가, 일의 내용은 박 이사장이 만드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이 여사는 98년 ‘사랑의 친구들’ 사단법인을 만든 이래 2001년까지 90억원을 후원금으로 모았다. 
 

▲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할 정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성문제에 조예가 깊었고, 상당한 관심과 의지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부인 이희호 여사의 역할이 상당했다.
45년 인연 박영숙 이사장을 싱크 탱크로
‘사랑의 친구들’이 발족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 여사는 여성기업인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등을 만나 국내 기부시장의 사정을 알아봤다. 강원룡 목사에게는 퍼스트레이디가 여성들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것이 타당한지, 정치적 후유증이 없을 것인지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여성재단’이다. 99년 한국여성재단이 발족하자 이 여사는 한국여성재단 명예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물론 이사장은 박영숙 현 이사장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 뒤에는 이를 주도한 인물이 있듯이 이희호 여사 옆에는 언제나 박 이사장이 있었다. 박 이사장과 이 여사의 인연은 45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 여사가 YWCA 총무로 일하면서 강의를 할 때 강사와 학생으로 만났다. 두 사람이 급격하게 가까워진 것은 명동사건으로 두 사람의 남편들이 구속되면서부터다. 특히 DJ가 연금상태에 있던 70년대 말에 이 여사는 우이동 박 이사장 집을 중요한 정치적 견해를 주고 받는 ‘안가’로 활용하곤 했다. 이 여사에게 박 이사장은 사랑의 친구들, 여성재단을 함께 일구어가는 싱크탱크이자 동지였다.

단독 해외순방으로 영부인 활동영역 확장
이 여사의 가장 뚜렷한 업적 중 하나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독자적인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이 여사의 해외방문은 총 5차례로, 2001년도를 제외하고 매회 1회 이상 단독 해외순방에 나섰다. 이 여사는 특히 역대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2년 5월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 의장국으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여사는 재임 중 소록도를 두번 방문했는데 육영수 여사 이후 영부인으로는 처음 찾는 것이었다. 이 여사의 소록도 방문을 계기로 소록도에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여사는 경호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원 재소자들과 이들의 부모를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또한 소년원을 영어와 컴퓨터 등의 특수교육을 하는 정보특화학교로 변모시켰다.

■ 이희호 여사 일대기

1922년 9월 21일, 서울 수송동에서 의사인 아버지 이용기씨와 모친 이순이씨 사이에서 6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남
1940년 이화여고 졸업
1942년~44년     이화여전 문과 재학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YWCA) 총본부 외교국장으로 1952년까지 활동
1953년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1956년 미국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공부
1958년 미국 스칼렛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졸업
 귀국 후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
1959년 대한YWCA연합회 총무 맡아 1962년까지 활동
1961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 맡아 1970년까지 활동
1962년 5월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
1963~65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과 강사
1964년 사단법인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으로 1970년까지 역임
 대한 YWCA연합회 상임위원이 되어 1982년까지 활동
1968년 범태평양 동남아세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되어 1972년까지 활동
1971년 김대중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
 5월 25일, 김대중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
1972년 10월, 유신 발표 이후 일본 망명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으로 강제 귀국 후 가택연금 
1976년 김대중, ‘명동 3·1민주구국선언’ 으로 긴급조치 제9호 위반 구속
1978년 김대중, 12월 27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가택연금
1979년 김대중, 3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10·26 사건으로 긴급조치와 가택연금에서 풀려남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발발
 9월 17일, 김대중,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 받음
1982년 12월 23일,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집행정지로 김대중 출소한 후 미국 망명 
1983년 김대중, 하버드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
1985년 2월 8일, 망명 2년 5개월 만에 당국의 반대와 주위의 암살 걱정 무릅쓰고 귀국.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12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 돌풍의 중심이 됨 
1987년 9월, 미국 노스이스턴대학교에서 인문학 명예 박사학위 받음
 김대중, 평화민주당 초대 총재 취임 및 13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1992년 김대중, 제14대 대통령 선거 입후보, 선거 패배 뒤 정계은퇴 선언
1994년 아태평화재단 이사로 1997년까지 활동
1995년 7월, 김대중 정계복귀 선언 및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6년 중국 톈진대학교 명예교수
1997년 6월, 미국 코럴 릿지 배티스트대학교에서 종교교육학 명예 박사학위 받음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제15대 대통령 영부인으로 취임, 대한민국 8번째 퍼스트레이디가 됨
 5월, 미국 워시본대학교에서 인문학 명예 박사학위
1998년 2월, ‘무궁화 대훈장’ 수훈
 4월,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靑山學院大學校) 명예 교육학 박사학위 받음
 5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학위 받음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총재가 되어 2002년까지 활동
2000년 한국여성재단 명예추진위원장으로 2002년까지 활동
 1월, 미국 남가주대학교 ‘국제사회복지상’ 
 9월, 미국 드류대학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
 10월, 서울대학교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2001년 펄벅 인터내셔널 ‘2000 올해의 여성상’ 
2002년 3~11월, ‘최규선 게이트’로 3남 홍걸씨 뇌물혐의로 소환되고 11월 11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추징금 2억원 선고 받음
 5월, 김대중 대통령, 새천년민주당 탈당
 5월, 미국 스칼렛 베넷센터 ‘평화와 정의를 위한 탁월한 지도자상’ 및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도덕적 인권 지도자상’ 수상
2003년 2월 24일,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퇴임
현    재 
전국장애인 체육대회 명예대회장(1998년~)
사회복지법인 전국공동모금회 명예회장(1998년~)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명예회장(1999년~)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 명예이사장
(1999년~)
대한암협회 명예회장(1999년~)
한국방문의 해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1999년~)
세종문화회관후원회 명예총재(2001년~)
재외동포교육진행재단 명예이사장(2001년~)
한국여성재단 명예고문

■ 참고문헌

도서
- 대통령가의 사람들, 오경환, 도리, 2003
- 영부인론, 함성득, 나남출판, 2001
-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 여성신문사, 1998
- 내가 만난 이희호, 피천득 외, 명림당, 1997
- 내가 사랑한 여성, 김대중, 에디터, 1997
- 나의 사랑 나의 조국, 이희호, 명림당, 1992

학술지
‘한국 대통령 부인 평가에 관한 연구’, 조은희, 정책과 미래, 한국정책학회, 2006 겨울

좌담회 ‘내가 만난 이희호 여사’ 
▶ 참석자 :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신낙균 민주당 수석부대표, 이승희 민주당 의원, 김영희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 이상덕 한국폴리텍1대학 학장
▶ 일시 및 장소 : 2006년 7월 21일 여성신문사 회의실 

이희호 여사 직접 인터뷰 3회
- 2006년 11~12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영부인 어머니와 자식들
“자식들에 제대로 못해줬다” 항상 빚진 마음
아들들 줄줄이 감옥행
한많은 어미로 죄책감
이희호 여사는 결혼 이듬해인 1963년 11월 42세에 홍걸을 낳았다. 늦은 출산이었지만 임신 중에 입덧 한번 하지 않았다. 
당시 두 아들 홍일, 홍업 형제는 각각 16세와 13세였다. 작고한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두 소년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이 여사는 홍걸을 안아주거나 귀여워하는 것에도 조심했다. 다행이 두 형제와의 관계는 원만해졌는데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홍걸이 문제였다.
홍걸은 원래 말수가 적었는데 커가면서 눈에 띄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홍걸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부터 기관원들이 학교까지 따라다녔다. 그리고 고2 때인 81년에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부터 경찰들이 집을 지키고 아무도 못들어오게 했다. 이런 상태에서 학교를 다닌 홍걸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낮잠만 잤다고 한다.
이 여사는 “나는 얼굴 들고 학교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다. 남들은 과외공부를 시키는데 집 상황이 안좋아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줄 수가 없었다”면서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다. 이 여사는 미국 망명 중이던 80년대 중반에 홍걸이 학업을 계속해주기를 원했는데 아들이 ‘한국에 가서 교수도 못할 텐데 박사는 해서 뭐 하냐’고 반발하는 바람에 더 이상 권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 부부는 자식들에게 제대로 못해줬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장남 홍일은 80년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신체장애를 얻었고, 차남 홍업은 야당 정치인의 자제라는 이유로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고, 결혼도 어려웠다. 막내 홍걸은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연구원의 신분으로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2000년 여름,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국정원의 정보라인에 홍걸과 최규선의 부적절한 행적이 낱낱이 보고된 것이다. 이 여사는 홍걸에게 “최규선을 만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홍걸은 “뭐가 문제냐”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2002년 5월 홍걸이 구속됐다. 홍걸의 구속 이후 한달 만에 다시 차남 홍업도 구속됐다.
“괴로웠다. 신문도 보기 싫고, 누구 만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까지 그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아이가 그러면서 들어가니까 그때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긴 터널을 거쳐 마침내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아들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내야 했던 ‘한 많은 어미’가 된 이 여사의 토로다.
“여사님의 체중이 갑자기 줄었다. 자식 때문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이 아들을 청와대에 못 오게 하고, 집에도 못 오게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대법원 확정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던 장남 홍일은 지난 2월 사면됐으며, 차남 홍업은 국회위원 출마를 준비 중이고, 막내인 홍걸은 광고 사업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전세를 살던 홍걸이 “동교동으로 들어와 살겠다”고 어머니를 조르자 이 여사는 “차라리 내가 나가 살마” 하며 가슴을 쳤다고 성인숙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이 전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DJ와의 결혼
"이희호가 사람보는 눈은 있었다"
결혼식에 빨간 양말 신고 나타난 낭인 DJ
1962년 5월10일 이희호 여사의 외삼촌 이원순옹의 체부동 한옥 대청. 한 남자가 늦을세라 헐레벌떡 대문에 들어섰다. 신랑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이었다. 그가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서자 하객들 속에서 갑자기 웃음보가 터졌다. 신랑의 감색 예복 아래 드러난 새빨간 양말이 너무도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당시 DJ는 거듭된 낙선으로 인해 경제적·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첫 부인과는 사별했으며 셋집에서 칠순 모친과 심장판막증을 앓는 누이동생, 그리고 자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더욱이 누이동생의 자녀도 둘이나 있었다. 양말을 챙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혼반지도 이 여사가 준비했다. 이 여사 나이 41세, DJ가 40세 때의 일이다. 
DJ와의 결혼에 대해 이 여사의 집안에서는 물론, 이 여사 주변에서도 찬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여성지도자로서 이 여사의 미래에 기대를 가졌던’ YWCA 동료들은 이 여사의 결혼 소식에 잠도 못자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반대를 했다.  
“그때는 대통령 꿈도 꾸지 않았다. 서로 좋으니까 결혼했다. 그이는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사회적 지위도, 집도, 재산도 하나도 없을 때 나는 그이와 결혼했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랑 결혼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운명 같다. 1962년에 다시 만났을 때 결혼할 마음을 두고 만났고, 그때 청혼을 해서 ‘네’라고 대답했다.”
신혼생활 9일 만에 남편이 정부전복 혐의로 잡혀가는 불상사가 있기는 했으나 결혼 이후 10년간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이 여사는 이듬해 아들 홍걸을 낳았고, DJ는 고초를 많이 겪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결혼 이듬해 DJ는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67년에는 재선의원이 됐다. 그리고 70년에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DJ가 대통령 후보가 되자 이 여사의 결혼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이희호가 과연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고 감탄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내가 본 이희호] 측근·전문가 좌담회
여성정책 가로막힐때 늘 도움의 손길 ‘활짝’
권위의식 없이 편안한 스타일
영부인으로서 행할 권력 거부
▲ 지난해 7월 21일 여성신문사 회의실에서 측근과 전문가들이 참석해 열린 이희호 여사 관련 좌담회.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승희 민주당 의원(전 청와대 여성정책 비서관), 신낙균 민주당 수석부대표(김대중 정부 문화관광부 장관), 진행을 맡은 조은희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장, (한 사람 건너) 김영희 전 청와대 제2 부속실장,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국민의 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던 신낙균 민주당 수석부대표는 이희호 여사에 대해 “한결같이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이 필요한 돌봄은 아낌없이 하면서 남편의 고유영역을 넘지 않은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신 전 장관은 “여성관련 문제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줬다”면서 “문광부 장관 재직시절 KBS 여성언론인들이 유리천장에 갇혀 진급이 어려웠는데 영부인이 관심을 가져줘서 길이 열리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정책 비서관을 지냈던 이상덕 한국폴리텍1대학 학장은 “남녀차별금지법을 만들 때 추미애 의원이 성명서를 내면서까지 반대하는 등 역풍이 심했는데, 윤후정 당시 여성특위 위원장이 이 여사에게 SOS를 치자 이 여사가 한화갑 총재를 설득해 통과시킬 수 있었다”면서 “여성정책이 제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 이 여사는 늘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고 전했다. 
이 여사의 초대 부속실장을 지냈던 김영희 전 KBS PD는 역사상 첫 1급 제2부속실장이 된 주인공이다. 제2부속실장 직급을 별정직 2급으로 하자고 논의가 모아졌는데 이 여사가 “어떻게 2급이냐, 1급을 줘야 한다”고 주장해 퍼스트레이디를 보좌하는 제2부속실장의 직급이 1급으로 격상되었다.
또한 김 전 실장은 “처음에는 이 여사가 집무할 수 있는 공간도 비서실장 방 밑의 조그마한 지하공간에 배치돼 있었다”면서 “‘이 여사가 도대체 우리가 이 좁은 방에 다 있으란 말이냐’고 야단을 치고 나서야 아래층 전부가 퍼스트레이디의 집무실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했다.
후반기 제2부속실장을 지낸 성인숙 전 청와대 부속실장은 상사로서의 이 여사 스타일에 대해 “당신이 갖춘 것이 너무 많아서인지 권위의식이 없어서 모시기가 편했다”고 말했다. 성 전 실장은 “이 여사는 대통령 배우자로서 행할 수 있는 권력을 스스로 거부한 아주 ‘독립적’인 분”이라고 평가하면서 “늘 ‘나는 내조자에 불과해요’ ‘나는 힘이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성 전 실장은 “옷로비사건도 이 여사가 적극적으로 대응했었더라면 그렇게 비화되지 않았을 것인데, 아마 무대응이 체질화되신 분 같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여성정책 비서관을 지낸 이승희 민주당 의원은 “이 여사는 초기에 많이 고민했다.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영부인 활동에 대한 예산 배정을 요청했는데 ‘백악관에도 없다’며 거절당했다”고 비화를 소개했다. 이 의원은 “영부인 연구를 해보면 영부인만이 감히 할 수 있고, 바로잡을 수 있는 고유의 역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 국민에겐 그 역할이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면서 “2000년 2월부터 가을까지 노력하다가 포기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이 여사는 나름대로 사고와 커리어가 앞서가는 분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역할모델을 할 수 있었다”면서 “만약 이 여사가 제대로 뜻을 폈으면 여성에 대한 사회인식이 훨씬 빨리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했다.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재단’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던 박영숙 여성재단 이사장은 “미국의 앨리노어 프랭클린 여사처럼 한국의 모범적인 영부인상을 정립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옷로비사건으로 위축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이사장은 “청와대 전체가 나서서 잘하면 보통이고, 못하면 마이너스라는 논리로 이 여사의 활동영역 확장을 막았다”면서 아쉬워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전문가 진단] 한국의 민주주의와 김대중 대통령
개혁 드라이브속 비리 얼룩

1997년 말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서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국민적 지지도 취약했다. DJP 연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당후보인 이회창씨를 39만표 정도로 이겼을 뿐이고, 2위 3위의 득표율 합은 57.9%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가 더 많았다. 더욱이 국회에서는 여소야대의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자민련과의 연합정권은 총리와 장관을 공동으로 운영해야 했다. 이러한 취약한 국민적 지지기반, 여소야대의 의회, 자민련과의 공동정권 등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과 비전을 관철하는 데 큰 제약을 주었다.
김대중 정권의 국정목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발전론’과 ‘햇볕정책’으로 집약된다. 민주주의는 여러 정치개혁을 통하여 참여민주주의로 더욱 심화시키고, 경제는 그동안의 관치경제를 IMF식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을 통해 시장 중심의 경제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경제개혁 사회양극화 심화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은 IMF 위기를 극복하고 4대 개혁을 통해 새로운 국가발전모델의 기초를 구축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경제개혁 정책은 금융개혁, 기업구조조정, 노동개혁, 공공개혁 등 4대 개혁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분담을 위한 생산적 복지정책,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서의 지식정보화가 추진되었다. 정보화의 추진은 내실을 거두면서 세계 제일의 지식정보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만들어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복지정책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1997년 0.29에서 2001년 0.35로 악화된 것처럼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비판된다.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은 지역주의 극복, 인권, 환경보호, 선거와 정당제도 개혁 등으로 표출되었지만 국민적 합의 도출이 다소 용이했던 경제적 이슈와는 달리 정치개혁은 소수파 정권의 한계와 정당간 이해관계로 인하여 좌절되거나 왜곡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과 전근대적인 정당통제 등에 의존하여 뚜렷한 성과 없이 극단적인 대립만을 불러일으키는 등 정치개혁을 퇴행시키는 한계를 노출하기도 하였다.

정치개혁 별 성과없이 불발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1999년 말 경제위기의 종언을 선언한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관심을 햇볕정책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결국 노벨평화상의 수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전환적 개선을 추구한 김대중 정권은 부시 정권의 수립과 그에 따른 대북 강경정책으로의 전환, 북한의 핵개발에 직면하면서 한반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 경제개혁, 남북관계 개선 등 김대중 정부가 내세웠던 정책목표는 김대중 정부가 처해진 제도적 제약 및 정책수단과 기본적인 갈등을 빚었다. 정책과 이념은 새로운 모델을 추구하는 변화 지향적이고 개혁 지향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민련이라는 보수세력과의 연합, 관료체제에의 의존, 여소야대 국회의 한계 등으로 인해 개혁 자체를 좌절시키거나 왜곡시켜 왔다.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기반인 청와대와 호남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것이 일정한 성과를 가져온 기반이자 부정과 비리를 낳은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기반의 협애화는 잇달아 불거져나온 측근들의 부정비리 사건과 두 아들의 구속 등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정치적 리더십을 와해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922호 [기획] (2007-03-23)
김용복 /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조은희의 대통령 배우자론] 한국편(5) 이희호 여사
업적 뚜렷한‘소통령’
역대 영부인중 가장 고학력·고령
젠더 이슈 직접 제기하고 움직여
▲ 대통령 퇴임 후 안착한 DJ 동교동 자택에 예나 다름없이 나란히 붙어있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문패.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생 민주화를 향한 역경을 함께 해온 ‘동지’의 표시이자 ‘평등부부’의 상징적 증거다.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필자가 지난해 겨울에 한국정책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희호 여사는 단임 임기를 보냈던 1980년 이후 영부인들 중 가장 훌륭한 영부인으로 꼽혔다. 유형별 분류에서 이 여사는 ‘뚜렷한 업적형“ 영부인에 속한다.
대한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이 여사는 젠더 이슈를 직접 제기하고, 그것을 움직여나간 첫 영부인으로 꼽힌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여성운동가 출신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여성 관련 이슈들이 쉽게 풀렸다.
이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의 정례적인 단독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한 첫 영부인이기도 하다. 비록 전임 손명순 여사가 단독으로 베이징 여성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1회에 그쳤다. 반면 이 여사는 단독의 정례적인 해외순방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해외순방을 한 것과 유사하다.
이 여사는 또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고학력의 대통령 영부인이다. 이화여전에다 서울대, 그리고 미국 스칼렛대 석사 출신의 유학파로 영어가 능통하다. 고교 졸업 후 고학을 했던 남편과 대조적인 학력이다. 이 여사는 퇴임 후에도 재임 중 만들었던 영부인 사업인 ‘사랑의 친구들’과 ‘한국여성재단’의 명예총재와 명예고문 등 다양한 분야의 명예직을 맡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역시 대통령 영부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 여사는 역대 영부인들 중 가장 고령의 나이인 76세에 청와대 안주인이 되었다. 만일 이 여사가 10년만 젊은 나이에 영부인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재임시절 논의됐던 ‘엘리노어 프로젝트’도 좀더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집권 중반기 이후 옷로비사건과 두 아들이 구속되는 사건들이 이어짐으로써 이 여사가 대통령 영부인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와 활동영역이 많이 축소됐다. 또한 한 개인으로서도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 되기 전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해온 한국 사회의 여성지도자였다. 이 여사의 삶은 40세 이전에 여성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 40대 이후 정치인 김대중의 아내로서의 내조기, 76세 이후 영부인 재임기, 그리고 퇴임 이후 등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40대 이전의 ‘히히호호’ 시대가 가장 찬란한 시기였을 것 같다. 연극의 극본은 물론, 주인공에다 연출까지 맡아 활동하면서 ‘21세기의 김활란’을 꿈꾸던 그 시기 말이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이 여사의 삶은 40대 이후에 더욱 빛난다. 결혼 이후 겪은 풍상으로 활달한 개성은 사그라들어갔지만 대신 이 여사는 ‘김대중’이라는 남자를 통해 더 큰 관점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여사에게 김 전 대통령은 남편이기에 앞서 독재에 맞서 조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려는 수호자였고, 이 여사는 그 수호자의 ‘동역자’였다.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없다’는 말 자체가 이희호 인생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 여사도 저서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서 “일생을 그에게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DJ의 동교동 자택 문패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DJ, 이희호 부부가 서로를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 문패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922호 [기획] (2007-03-23)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출처 : 쌍코 카페
글쓴이 : 하하하ㅋ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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