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스크랩] "고문으로 산 귀신이 된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갔다"

멋진 결혼을 하자 2008. 4. 1. 13:37
"고문으로 산귀신이 된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갔다"
4.3증언 본풀이마당 '소외의 그늘에 사는 사람들' 열려
2008년 03월 28일 (금) 18:28:44 양미순 기자 jejuyang@hotmail.com

"그때가 열세살이었지. 어느날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쥐새끼 한마리 남기지 말고 모두 나오라'고 허난 2살바기 조카까지 온 식구가 아버지 따라 화북국민학교에 갔주. 오빠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오빠 친구들 이름이라도 대라고 하는데 알아야 이야기를 하지. 모른다고 하니까 '빨갱이새끼들은 이렇게 거짓말을 잘한다'며 머리를 내리쳐서 정신을 잃었다 깨보니 코피가 엄청나게 쏟아졌지. 책상에 칼 닮은 거 탁! 때리멍 솔직허게 고르랜 계속 때리는 거라. 총이영 칼이영 보난 막 무섭고 했는데 밖에 보난 사람들 쫙하게 세워낭 그 앞엔 총을 겨누고 있는 거라. '저거 쏘우잰 햄시가...' 생각허는디 빠빠방 허난 사람들이 쓰러지는 거라. 우리 아버지는 문화주택 위에서 총살 시켱 그 물속에 빠쳐분 거라. 다른 사람들은 신체도 빨리 찾았주만은 난 친척도 엇고 놈도 해주지 안허난 저수지 벌겅헌 물만 보멍 울기만했주. 어떤 사람 의지행 아버지 겨우 건정 대충 묻어뒁 집에 강 어머니 기다리당 잠들어신디 '으으으~' 소리에 눈 번쩍 드난 어머니가 머리 다 허우쳐졌지, 온몸이 피투성이고 손가락 다 꺾어졍 지렁지렁허곡 치마고 버선이고 벗어진 맨발에 나 앞에 딱 서 이신거 아니. 어머니랜도 못 부르곡 모소왕 도망갔당 다시 왔주. 제대로 된 치료도 못하고 상처를 오줌으로 소독하며 지냈다. 그 소시에 아버지, 언니, 오빠, 올케, 조카 덜이영 다 죽곡 나만 도망쳐서 살아난."

 

   
 
▲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던 오빠로 인해 온 가족이 몰살 당한 김인근씨 ⓒ제주의소리 양미순 기자
 
4.3당시의 잔혹했던 기억을 상세히 회상하는 김인근씨(73·제주시 화북동)는 "지금은 오늘 한 거 내일 되면 잊어버리는데 그때 일은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그 때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지금도 바들바들 떨린다"고 뼈아픈 심정을 토로했다.

 

김인근씨는 "지금도 호루라기 소리하고 차소리만 나면 벌벌 떨리고 어지럽고 토해지고... 이제는 협심증으로까지 생겼다"며 "그 때 일은 절대 잊혀지질 않는다"고 덧붙였다.

 

28일 오후 2시 제주특별자치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4.3증언 본풀이마당에서는 60년의 한을 풀어내는 4.3피해자들의 한숨과 눈물로 보는 이를 숙연케 했다.

   
 
▲ ㈔제주4.3연구소는 28일 오후 4.3증언 본풀이마당 일곱번째 '소외의 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마련했다. ⓒ제주의소리 양미순 기자
 
㈔제주4.3연구소가 마련한 일곱번째 4.3증언 본풀이마당에는 고순열씨(77·여·제주시 도남동), 김주전씨(74·남·제주시 화북동), 김인근씨(73·여·제주시 화북동), 김낭규씨(68·여·제주시 조천읍) 등이 참석해 60년전을 회상했다.

 

고순열씨에게 4.3은 '남 부끄러워서 입에 담지도 못했던' 이야기이다.

고순열씨의 본가는 4.3으로 인해 대가 끊겼다. 외아들이던 아버지가 4.3으로 행방불명되고 자식은 고씨 하나였기 때문이다. 외가 역시 4.3의 광풍으로 외삼촌 모두가 희생 당했다.

 

이후 결혼한 고순열씨는 4.3후유증을 앓는 남편 김여랑씨와 함께 평생 4.3의 멍에를 안고 살아야 했다.

 

   
 
▲ 4.3증언 본풀이마당을 찾은 젊은이들. 이들은 4.3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제주의소리 양미순
 

고씨의 남편 김여랑씨는 4.3당시 열아홉살의 청년으로 무고하게 농업학교에 붙잡혀 가 모진 매를 맞고 인천형무소에서 1년형을 마치고 나왔다. 하지만 고향에서는 그를 '폭도 새끼!'라며 반기지 않았고 홧김에 지원입대를 했지만 이후 상이군인으로 전역했다. 이후 4.3후유증과 전쟁부상으로 정상생활이 어렵고 나이가 들어서는 말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 지난 2006년 타계했다.

 

김주전씨의 비극은 일본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큰형이 가족도 모르게 제주에 들어와 산으로 가면서 시작됐다.

 

경찰은 삐라를 뿌리다 잡힌 사람이 김주전씨의 큰형 이름을 거론했다고 가족 모두를 잡아다 고문을 했다.

 

   
 
▲ 김주전씨는 연좌제로 인해 끊임없이 부당대우를 받아야 했다. ⓒ제주의소리 양미순 기자
 
김주전씨는 "가족도 모르는 형의 행방을 물으며 경찰은 부모고 누구고 마구 잡아가서 모진 매를 쳤다"며 "집도 태워버리고 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5.10선거를 기준으로 가족들이 모두 산으로 도망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주전씨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잡혀갔는데 할아버지가 트럭에서 어머니를 밀어내면서 어머니는 살아나고 차를 탄 가족은 모두 희생당했다"고 증언했다.

 

가족의 몰살만으로도 부족해 김주전씨에게는 연좌제라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해군에 지원입대해 26년을 복무했지만 연좌제로 인해 상사가 되고도 1년 이상 보직이 주어지지 않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김주전씨는 "당시 무능력자는 강제로 제대를 시킬 수 있었지만 연좌제로는 제대를 못 시켰다. 알아서 나가라는 식으로 대기대에 1년이상 두었지만 끝까지 버텼다. 연좌제, 내가 이것만은 벗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죽도록 열심히 해서 나중에는 보국훈장 광복장까지 받고 제대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4.3이라고 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김주전씨는 "지금도 이야기 못하는데 마을사람들이 죽던 날 산사람에게 피해 본 사람이 나에게도 운동장에 가 있으라고 했지만 가지 않고 빈 드럼통에 숨어있었다. 그래서 살았는데 숨어서 본 것이 결혼해 쌍둥이를 갓 얻은 8촌형이 끌려가 총살 당했다. 그 부모가 시신을 수습해 집에 오니 숨이 붙어있는데 병원도 못데리고 가고 어찌할 줄을 모르니 아들이 살았다고 신고를 하니 다시 잡아다가 대창으로 찔러 두번 죽였다. 그때 쌍둥이 조카가 지금 예순을 바라본다. 하지만 차마 조카들에게는 그때 일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큰숨을 내쉬었다.

 

가슴에 맺힌 한이 많지만 그래도 이제는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 한다.

 

김주전씨는 "죄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희생당해 억울한 마음도 있지만 어디든 억울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서로 조금씩 참자. 경찰이든 산사람이든 좋은 해결을 찾았으면 한다"고 맺었다.

   
 
▲ 제발 살려달라고, 그만 때리라고 빌고 또 빌었다는 김인근씨 ⓒ제주의소 양미순 기자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던 오빠로 인해 김인근씨는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었다. 어머니도 7발의 총탄을 맞고 산귀신이 되어 평생을 4.3때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김인근씨는 "그래도 모성이 얼마나 강한지 7발의 총을 맞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총상을 입을 딸을 업고 마을까지 돌아왔다. 그래도 언니는 살지 못했다"고 눈물 지었다.

 

김낭규씨는 산에서 활동하던 아버지 김대진씨로 인해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희생 당했다.

당시 신촌국민학교 교사였던 김낭규씨 아버지 김대진씨는 4.3이 발발하면서 산에서 활동하다 총살 당했다.

 

김낭규씨는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3.1운동 때는 집에서 등사판으로 태극기를 만들기도 하는 등 지식인이고 애국자셨다"고 회상했다.

 

김낭규씨는 "산에서 활동한 아버지로 인해 할아버지, 할머니도 잡혀가서 총살당하고 어머니도 26살 꽃다운 나이에 두살난 막내 여동생을 외할머니에게 떼어주고 가서는 죽어서 돌아왔다"며 "젊은 여자이고 해서 그런지 어머니를 한번에 죽이지 않고 잔인하게 한번 쏘아서 살려고 기어가면 또 쏘고 또 쏘고 하면서 노리갯감으로 삼다 죽여서 나중에 시신 수습하고 보니 손에 손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처참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부모 없이 자라며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어디가서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고 살았는데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면서 다시 한번 4.3이 한으로 다가오더라. 둘째 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장교시험을 봤는데 신원조회에서 탈락했을 때는 정말 자식들 앞길 위해 이혼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가슴을 쳤다.

 

   
 
▲ 김낭규씨의 아버지 김대진씨는 산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제명당했다. 김낭규씨에게는 아직도 4.3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의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제주의소리 양미순 기자

출처 : 쌍코 카페
글쓴이 : 똥낀 도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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