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어미 위에서 젖 빨던 그 아이 잊을 수 없어" | ||||||
[4.3 60주년]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동백꽃 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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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의 역사적인 의미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열렸다. 이때 총 의석수는 200석이었으나 2표의 무효로 인해 제헌의회는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출범했다. 이 '-2'라는 숫자는 현대사에서 그리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 정체성에 상처가 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정치인생의 오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 당시에는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동의어였다. 이승만은 현대사에서 '굴종'이라는 선례를 남기며 권력을 누렸다. 자주독립을 위해 가산과 전 인생을 반납한 독립운동가와 그 자제들, 일제에 협조하여 가산을 지키고 권세를 누렸던 친일파와 그 자제들의 운명은 이승만이 미 군정에 굴종하며 친일세력을 대거 재임용함에 따라 갈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현대사는 '굴종'이라는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해왔다. 일상이 된 재벌의 편법과 탈법, 정치인과 공직자의 일상적인 부패상은 이 '굴종의 현대사'를 더욱 빛내고 있다.
제주 북제주 갑·을 2개 선거구의 무효는 이러한 '굴종'에 이의를 단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이듬해 5월 10일 이 두 개의 상처(?)는 신속하게 다른 '굴종'들로 채워졌다)
이 '-2'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던진 죄로 당시 제주 인구 30만 명의 1/10인 약 3만 명이 죽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2003년 통과))
선거철마다 주요 정당이 제주에서 경선을 시작하는 것은 비단 제주가 국토 하단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거의 향배를 예측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오랫동안 자처한 제주의 민심은 그 기원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
예컨대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의 전국 투표율은 48.7% 대 26.1%였다. 이 차이는 22.6%로 두 후보 사이에 한 명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들어갈 틈이 있을 정도였다.
제주의 투표율은 어땠을까? 이명박 후보 38.3% 대 정동영 후보 32.4%로 불과 6%P 미만의 차이였다. 그나마 정치색이 덜하다는 서울도 53.1% 대 24.4%로 더블스코어 이상의 결과가 나왔던 때다. 제주도의 이 묘한 정치적 균형감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제주 4·3을 말해주는 '세 가지 마음'
제주 4·3을 감성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를 관통하는 세 개의 마음이 존재한다. 첫째, 5·10 남한 단독선거가 제주도의 거부로 절름발이가 되자 이에 격분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폭언을 공공연하게 내뱉었다.
실제 제주 4·3의 전 과정에 걸쳐 가장 처참한 집단 학살과 초토화 작전이 자행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3개월 만인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이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즈음이다. 제주도에 내려온 서북청년단원이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는 바와 같이 제주 4·3의 일차적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다.
둘째는 서북청년단의 '증오심'이다. 일명 '서청'으로 불리는 서북청년단은 당시 북한에서 사회개혁을 하자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자신들의 터전을 없애버린 세력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품은 서청과 남로당의 적극적인 활동지인 제주도의 만남은 처참한 홀로코스트를 낳았다.
셋째는 제주도민의 공분이다. 제주도는 이승만의 반공 국시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본 지역에 속하는데, 혹자는 제주 4·3을 '빨갱이들의 선동과 주민들의 동조'로 보고 '4·3특별위원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당국의 행태에 공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주도민의 특이한 이력을 살펴야 한다.
제주도가 척박하고 고립된 땅이라고해서 그 정신마저도 고립된 것은 아니다. 제주는 예부터 최후의 유배지로 꼽혔는데, 유배 온 양반들은 제주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유난히 제주도에는 유풍과 학식이 생활상에 고루 반영돼 있다.
일례로 국어학자 이기문은 일조각에서 발행한 <속담사전>에서 해방 이후의 중요한 업적으로 <제주도 속담 1,2>(진성기 편저)를 소개하며 사전편찬에 도움받은 바가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나 역시 어머니로부터 수십 년 동안 '해태(懈怠)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는데, 이는 '해이하거나 태만하지 말라'는 일반에서는 보기 드문 한자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늦게 상륙한 이유도 있지만, 제주도민들은 그야말로 해방감을 가장 깊이 맛본 사람들이었다. 이때 남한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치안과 정책을 수행하였다.
제주 4·3의 시작이라 할 만한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지역 곳곳에서 개벽 이래 최대 인파인 3만 명 정도가 참여한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였다. 3만 명이 운집한 것도 대단하지만 주민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친 '3·1절 발포 사건' 직후 이에 항의해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가 파업에 가세한 '민관 총파업'이 제주도민의 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가 서중식 교수는 <동백꽃 지다>(보리)의 부록 논문에서 "제주도는 밭이 99%인데다 땅이 척박하여 소출이 적은 관계로 육지에 비해 계급 갈등의 소지가 미약했고 혈연 공동체적 요소와 사회경제적 성격으로 인해 도민들이 쉽게 단결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자료2 <제주 4·3항쟁 일지>에 의하면 3·1절 발포 사건 이후 단행된 민관 총파업을 두고 경무부(지금의 경찰청) 최경진 차장이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161쪽) 이는 단선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단지 제주인들은 부패하고 굴종스러운 기득권의 부조리한 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마음들의 충돌은 제주 4·3이라는 필연적인 비극을 만들어낸 동력으로 작용했다.
강요배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가 나왔다
올해로 제주 4·3 60주년을 맞는다. 그에 걸맞게 다채로운 행사가 제주에서 펼쳐진다. 출판에 업을 두는 사람으로서 나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보리)가 나왔다는 데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책을 보자마자 밤새 삽화와 증언을 살폈다. 대학시절 익숙하게 보았던 그림들이 한 책으로 묶인 점이 좋고, '제주 4·3전문가 김종민'씨가 발품을 팔아서 '당사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는 점도 좋다. 이 책은 1998년 학고재에서 낸 <동백꽃 지다>를 다시 낸 것인데, <동백꽃 지다>는 강요백 화백이 1989년부터 3년 동안 '제주 4·3항쟁'을 다룬 그림 50점을 1992년에 발표한 전시회의 제목이다.
강요배 화백은 '기행'으로 더 유명한데,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 있다. 바람과 풍랑이 잦은 제주도에서도 격렬한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밤에 강요배는 붓과 캔버스만 들고 열 번도 넘게 바다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것은 파도와 비바람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다.
현재 '민족미술인협회' 회장과 '제주 4·3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소재는 종이, 펜, 먹, 캔버스를 가리지 않았으며 증언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선택했다. 역시 제주 민중의 일상사와 당시의 처지를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그렸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119쪽의 '젖먹이'와 133쪽의 '빈젖'은 당시의 처참한 일상을 고스란히 설명해 준다. '젖먹이'에 대한 증언은 김석보씨(조천읍 북촌리)의 1998년 증언에 담겨 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118쪽)
제주어에 '속솜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침묵하거나 아주 작게 말하다'는 뜻이다. 나는 제주 4·3이 발발한 지 30년, 한 세대 정도 지난 197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4·3이라는 것을 알고 최초로 어머니에게 물었던 게 스무 살이 되었을 때니까 일이 벌어진 지 50년이 지난 때다.
어른들은 그 당시의 일을 입에 담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했고 그것을 내면화했다. 4·3의 기억은 제주 사람들의 일상습관을 바꿔버렸다. 어머니와 이모가 우연히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별로 비밀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속솜하게 말했다. 이 장면이 두고두고 이상했다.
비단 어머니와 이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제주 4·3에 속솜했다.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자고 열변을 토했던 참여정부도 역시 제주 4·3의 거대한 뿌리는 만지지 못했다.
<나의 서양 미술사 순례>를 써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가르쳐준 '재일 조선인 2세'이자 도쿄 케이자이 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인 서경식씨는 '추천하는 말'에서 "'4·3'은 알지 못해도 되는 사건이 아니며 알 필요가 없는 사건도 아니다. 4·3은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인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9쪽)라고 말했다.
1987년 당시 대한민국이 절차적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가 실현된 것에 머무른 것처럼 제주 4·3 역시 단지 '특별법'이 통과되었을 뿐 그것의 역사적 의미나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알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4·3 특별위원회 폐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이다.
단지 제주인만의 문제, 피해의식의 문제, 감성의 문제, 빨갱이 문제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성숙한 관심으로 세심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환갑이 다 되었으니 '철'이 들 만도 하지 않았나?
덧붙이는 글 | 책의 삽화는 보리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사용합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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